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마누엘 칸트 (문단 편집) === 10년의 연구 결과, 『순수이성비판』 === 10년 간의 연구 결과인 그 원고는 1780년 가을에야 완성되었다. 칸트는 최근 칸터[* 요한 야콥 칸터(Johann Jacob Kanter): 쾨니히스베르크의 서적상이자 출판업자. 칸트는 사강사 생활 동안 칸터의 집에 세들어 살았으며, 몇 편의 논문을 칸터를 통해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의 책방을 넘겨받았던 고트리프 렙레히트 하르퉁에게 그것을 출판해달라며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출판을 거절했다. 이러한 추상적인 형이상학 논문으로는 돈이 벌리기는커녕 잃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칸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때 하만[* 요한 게오르크 하만(johann Georg Hamann): 칸트의 친구이자 제자. [[데이비드 흄|흄]]의 『인간본성론』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칸트는 이 책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 하만은 훗날 항구의 세관창고 관리가 된다.]이 칸트를 도우러 왔다. 그는 리가의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하르트크노흐와의 접촉을 중재했는데, 이 사람은 원고에 흥미를 보이면서 심지어 논문의 대가로 칸트에게 약간의 사례까지 지불하겠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오랫동안 미루어진 그 일은 이렇게 해서 마침내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쳤다. 1781년 5월, 라이프치히의 부활절 장에서 리가의 출판인 요한 프리드리히 하르트크노흐에 의해 쾨니히스베르크 교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원고는 1780년 가을에 완성되었다. 칸트는 최근 칸터의 책방을 넘겨받았던 고트리프 렙레히트 하르퉁에게 그것을 출판해달라며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출판을 거절했다. 이러한 추상적인 형이상학 논문으로는 돈이 벌리기는커녕 잃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칸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때 하만이 칸트를 도우러 왔다. 그는 리가의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하르트크노흐와의 접촉을 중재했는데, 이 사람은 원고에 흥미를 보이면서 심지어 논문의 대가로 칸트에게 약간의 사례까지 지불하겠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미루어진 뒤에야 마침내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1781년 5월, 라이프치히의 부활절 장에서 리가의 출판인 요한 프리드리히 하르트크노흐에 의해 쾨니히스베르크 교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25~226)] 그러나 판매 부수는 매우 미미했다. 아무도 칸트의 생각을 좇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친한 친구들마저도 머리를 흔들 정도였다. 친구들이 보기에는 『순수이성비판』은 신비스럽고 암호 같은 것이었다. 히펠은 너무 어려워서 이 책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고 어떤 도움이 되겠냐고 반문했고, 멘델스존은 견본만 보았는데도 가슴을 쥐며 매우 답답해서 기운이 빠질 지경이라고 말했다. 블뢰머는 이 책을 읽으면 전제되어야 할 단어가 너무 많아서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모르는 단어를 헤아리는 손가락을 모두 접게 된다고 불평했다. 그나마 칸트의 생각을 제대로 검토한 하만조차도 세번째 읽는데 막혔다면서 네번째 읽기에서는 이해되기를 소망할 정도였다. 결국 하만이 나서서 칸트에게 철학의 문외한도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요약본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1783년 초, 칸트는 리가에 있는 하르트크노흐의 집에서 『학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문』, 즉 『프롤레고메나』를 출판한다. 이 책에서 그는 더 광범위한 독자들을 위해 『순수이성비판』의 핵심 생각들과 그 철학적 배경을 되도록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2년여가 지난 뒤 칸트는 저명한 대중 철학자 크리스티안 가르베에게 "처음부터 내 저서에 대한 신속한 환대는" 그 자신도 기대하지 않았다고 편지를 썼다. 가르베는 칸트에게 이 세상의 어떤 책도 "읽는 데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인" 것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이 어렵고 심원한 작품은 그를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넘어설 수 없는 난해함에 거의 언짢아졌다고 했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판매 부수는 매우 미미했다. 아무도 칸트의 생각을 좇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친한 친구들마저도 머리를 흔들 정도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읽도록 요구하기에는 신비스럽고 암호 같은 것이었다. (중략) 하만은 칸트가 대중적인, 철학의 문외한도 읽을 수 있는 요약본을 작성하도록 설득했다. 칸트는 그에게 설득되었다. 1783년 초, 리가에 있는 하르트크노흐의 집에서 『학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문』, 즉 『프롤레고메나』가 출판되었는데, 이를 통해 칸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생각들과 그것의 철학적 배경을 더 광범위 한 독자를 위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27~229)] [* 히펠은 1781년 7월 17일 셰프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그들은 벌써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찾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내게 너무나 높습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찾아낸다고 해서 어떤 도움이 될까요?" 멘델스존은 전율을 일으키는 그 책의 견본을 보자마자 완전히 옆으로 치워버렸다. 가슴을 쥐고 하소연하듯, 그는 칸트에게 "매우 불편하다. 다시금 바라건대, 나는 견본과 같이 만들어져 나오는 일이 영원히 없길 바란다"고 했다. 2년 뒤인 1783년 4월 10일, 멘델스존은 비로소 연락을 취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반어적으로 드러냈다. "자네의 『순수이성비판』은 건강의 시금석이네. 기력이 늘었다고 생각될 때마다 나는 기운을 빼버리는 이 작품에 대들어본다네. 그런데 죽기 전에 그것을 완전히 숙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완전히 없지는 않다네." 다시금 가슴을 짓누르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가장 집중적으로 칸트의 비판을 검토한 하만 ㅡ 그는 1784년에 언어철학적으로도 방향을 지시하는 『이성의 순수주의에 대한 메타비판』을 썼다ㅡ은 1781년 10월 10일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헤르더에게 보냈다. "나는 칸트 저술의 세번째 강독에서도 막혔다네. 네번째는 아마도 통과해야만 할 것이네. 그러나 나는 그가 말을 끝맺도록 해볼 것이고, 발췌본이나 독본이 되어야 할 다음 저술을 기다릴 것이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28~229)] [* 칸트는 자신의 『순수이성비판』이 직면했던 사소한 반향을 고통스럽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이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부장관 프라이헤르 폰 제드리츠와 그의 개인비서인 비스터는 그들이 받은 헌정본에 대해 침묵했다. 고귀하게 평가를 받는 모제스 멘델스존은 칸트의 작품을 신경을 자극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의 옛 학문적 동료인 블뢰머는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면서 손가락이 부족했다는 냉소조의 생각을 내뱉었다.(그래, 여보게 친구, 자네의 서술 방식은 괄호에 넣고 전제되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한 단어에 한 손가락을 대고, 두번째 단어에 다음 손가락을 대고, 이렇게 계속하다보니, 한 쪽을 넘기기도 전에 내 모든 손가락이 단어들을 지적하고 있네") 이러한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칸트는 자신의 정신적인 성과를 어떤 고결한 사회가 소유하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쓴 것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88~289)] 뉴턴은 어떤 일이나 사건에 관계없이 스스로 한결같이 흐르는 절대적ㆍ현실적 시간을 가정했고, 또 움직이지 않고 항상 똑같이 머물며 마찬가지로 "자신 밖의 어떤 것과도 관계 없이 존재하는" 절대적ㆍ현실적 공간을 가정한다. 칸트는 이와 반대로 뉴턴의 절대주의를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순수 형식 조건으로 선언했다. 그는 시공을 주관화하고 그것들의 객관적 성격을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의 대상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형식 조건들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이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형식 조건을 재구성하는 일을 순수 수학의 과제로 선언했다.[* 칸트는 이와 관련해 뉴턴을 화제의 실마리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를 반박했다. 왜냐하면 뉴턴은 어떤 일이나 사건에 관계없이 스스로 한결같이 흐르는 절대적ㆍ현실적 시간을 가정했고, 또 움직이지 않고 항상 똑같이 머물며 마찬가지로 "자신 밖의 어떤 것과도 관계 없이 존재하는" 절대적ㆍ현실적 공간을 가정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상대적 시간과 상대적 공간은 물체의 운동과 위치에서 직접적ㆍ감성적으로 지각될 수 있다. 칸트는 이와 반대로 뉴턴의 절대주의를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순수 형식 조건으로 선언했다. 그는 시공을 주관화하고 그것들의 객관적 성격을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의 대상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형식 조건들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이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형식 조건을 재구성하는 일을 순수 수학의 과제로 선언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59~260)] 즉,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현상에 우리 스스로가 질서와 규칙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 심성의 본성이 그것들을 처음부터 거기에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오성 자체가 자연법칙의 원천이다." "오성은 자신의 법칙을 자연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그것을 규정한다." 그것이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을 들어 말했던 칸트의 대담한 혁명이다.[*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현상에 우리 스스로가 질서와 규칙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 심성의 본성이 그것들을 처음부터 거기에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오성 자체가 자연법칙의 원천이다." "오성은 자신의 법칙을 자연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그것을 규정한다." 그것이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을 들어 말했던 칸트의 대담한 혁명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63)] 하지만 그를 도덕적으로 자극했던 실천철학의 세 가지 큰 문제들은 이 길 위에서 답변될 수 없었다. 인간 본래의 것을 형성하는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자연법칙으로 결정된 세계 속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는 어떠한가? 그리고 신의 현존은 시령자의 상상 속에서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환상 이상인가?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이 이 문제를 자연철학적 지식의 영역 밖으로 경계지웠다고 해서 그것의 매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은 또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자기 자신의 경계 설정을 명시한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 실천적인 것만이 관계해야 할"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이성의 순수한 사용의 최후 목적"을 칸트는 도덕형이상학과 실천이성의 비판에서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음에 주어질 그의 큰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를 도덕적으로 자극했던 실천철학의 세 가지 큰 문제들은 이 길 위에서 답변될 수 없었다. 인간 본래의 것을 형성하는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자연법칙으로 결정된 세계 속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는 어떠한가? 그리고 신의 현존은 시령자의 상상 속에서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환상 이상인가?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이 이 문제를 자연철학적 지식의 영역 밖으로 경계지웠다고 해서 그것의 매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론이성의 형이상학은 또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자기 자신의 경계 설정을 명시한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 실천적인 것만이 관계해야 할"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이성의 순수한 사용의 최후 목적"을 칸트는 도덕형이상학과 실천이성의 비판에서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음에 주어질 그의 큰 과제일 것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265~26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